그대 어디 있는가

| 2004.03.14 18:02 | 조회 4661
그대 어디 있는가 벼를 거두고 난 논에서 마른 볏짚 냄새가 난다. 깨를 다 털고 났는데도 밭에 쌓아둔 깻단에서 고소한 냄새가 번져온다. 이렇게 짙은 국화향기는 어디서 나는 걸까. 이 근처 어디에 들국화가 피어 있나보다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노란 애기들국화가 다복다복 모여 피어 있다. 그대 있는 곳에는 지금 무슨 향기가 나는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을 그대는 이 저녁 무슨 향기를 맡고 있을까. 그대가 사랑하는 이는 오늘 하루 무슨 향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향기도 냄새도 전혀 맡을 수 없는 것들만을 만지며 또 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는가. 저녁 노을 곱게 드리운 분홍빛 하늘 위로 몇 마리 물오리들이 나란히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인다. 한 식구인지 일곱 여덟 마리의 오리들이 함께 머물 곳을 찾아 날아가고 있다. 억새풀들이 하얀 머리칼을 날리며, 사는 게 이렇게 조금은 쓸쓸한 일이라고 말하는 듯 빈들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그대 있는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는 무엇이 눈에 보이고 있는가. 사람의 숲에 갇혀 하늘도 노을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 사랑하는 이는 이 세상 어떤 눈썹보다도 곱게 그린 초저녁달이 미리 나와 저녁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을까. 벽에 갇혀 가상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그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뭇잎이 바람에 몸을 씻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소리가 들린다. 먼저 지상에 내린 플라타너스 잎이 가벼워진 몸을 끌고 가며 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목소리가 들린다. 개울물이 자갈돌을 만나 모난 곳을 버리라고 말하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는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들어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소리들 속에 묻혀 지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는 않는가. 그대가 사랑하는 이는 무슨 소리를 가까이 하며 살고 있는가. 그대 사랑하는 이에게 익숙해져 있는 소리는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인가. 국화잎을 만졌더니 손에서 국화냄새가 난다. 과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더니 진한 보라색, 자주색 과꽃빛이 물들 것 같다. 느티나무 잎에서는 느티나무를 사랑하던 바람소리가 느껴지고 갈참나무 등걸에서는 세월의 두께가 만져진다. 그대 손에는 지금 무엇이 들려 있는가. 무얼 꼭 잡고 있는가. 딱딱한 물건이나 짐승의 가죽은 아닌가. 금속성의 그 어떤 것이 들려 있다면 그걸 가만히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 그대 사랑하는 이도 차갑고 싸늘한 것들을 만지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싸늘한 것에 익숙하고 경직된 것을 편안하게 여기며 목소리에 금속성이 배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대 부디 삭막한 곳을 지나더라도 마른 꽃향기를 만나기를. 회색 콘크리트를 덮은 담쟁이 잎을 찾아보고, 가슴 적시는 악기소리에 잠시 젖어 있기를. 보도블럭 위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라도 손에 주워들고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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