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불렀을까

홈지기 | 2011.06.14 22:37 | 조회 4448

시내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빨리 산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산방에 누가 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오늘 낮에도 도서전시회장에 나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데도 일이 있어서 안 되겠다고 하고는 돌아왔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친구는 “어디 또 다른 데 약속이 있나 보지?” 하고 물었고 나는 짐짓 그런 약속이나 있는 것처럼 “응” 하고 얼버무리고는 돌아왔지만 내가 한 일은 텃밭에 가서 풀 뽑고 밭 맨 것밖에 없습니다.

 

오후 내내 상추밭을 매면서 나도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나를 부른 것일까? 낮부터 울어대는 소쩍새가 나를 부른 것일까. 꾀꼬리는 몸이 무거워진 암꾀꼬리 둥지 옆에서 날개를 접고 오수를 즐기는지 아무 소리가 없고, 숲 건너 쪽에서 뻐꾸기만 한가하게 우는데 그 뻐꾸기가 나를 부른 것일까. 툇마루에 놓아둔 밤알 네 개 중에 한 개를 물고 간 아기다람쥐가 나를 오라고 무슨 신호라도 보낸 것일까. 어두워지기도 전에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산비탈을 내려오는 고라니가 나를 찾은 것일까. 오늘 처음 몸을 연 작약꽃이 자줏빛 웃음으로 나를 오라 한 것일까.

작약꽃은 오래전, 시골학교에 근무할 때 순박하면서도 참 활발하던 제자 아이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아이는 늘 볼이 붉은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먼 친척 언니는 동생과 달리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는데 나는 그 여자가 꼭 찔레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찔레꽃, 보랏빛 붓꽃의 입술에 가만히 내 입술을 부비며 이 꽃들이 나를 불렀을까 생각해봅니다. 
 
내일 비가 오면 풀들이 더 자라서 치마상추 겨자상추의 몸이 다 풀에 묻혀버린다며, 비 오기 전에 빨리 돌아오라고 텃밭에 있는 채소들이 나를 부른 것일까. 토란 순, 연잎, 머위, 곰취 이파리들이 푸른 손으로 나를 손짓해 부른 것일까. 누가 나를 불러 허위허위 빈 집으로 달려오게 한 걸까.
그러나 돌아오면 늘 잘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산방에 와 있으면 마음이 다시 청안해집니다. 맑고 편안해집니다. 이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부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나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와 같이 있자고, 우리도 네가 있어야 심심하지 않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숲은 점점 녹음으로 짙어지며 반짝반짝 생기가 돕니다. 소쩍새 소리도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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