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홈지기 | 2013.03.28 18:11 | 조회 5686

 매화는 참 더디 핍니다. 꽃망울이 맺히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꽃망울이 터져 몸을 바꾸는 데도 꽤 오래 걸리고 그 꽃망울이 터져 꽃으로 몸을 바꾸는 데도 꽤 오랜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침마다 오늘은 꽃이 피었을까 하고 나가 보면 어제 그 꽃망울이 그대로 있는 날이 많습니다. 매화보다 내가 더 초조해집니다. 매화가 필 때면 나는 신생아실 바깥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초산의 아비처럼 맘이 분주합니다.

 

 매화는 화려한 꽃이 아닙니다. 작고 조촐한 꽃입니다. 매화는 진하고 뜨거운 꽃이 아니라 차고 맑은 꽃입니다. 다섯 장의 작은 꽃잎이 모여 만든 소박하고 동그란 얼굴은 말수가 적고 겸손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도시의 세련된 여인을 떠올리기보다 시골이 고향인 순박한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론에 밝은 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 가난하고 진실한 선비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근원 김용준 화백은 "방 한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꽃이 매화라고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나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아서 매화를 대할 때면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를 대하매 아무런 조건없이 내 마음이 황홀하여지는 데야 어찌하리까."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퇴계 선생은 매화가 피는 겨울 섣달 초순에 운명하셨는데, 돌아가시던 날 아침 화분에 기르던 분매에 "물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퇴계 선생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퇴계 선생은 깨끗하디깨끗하고 맑디맑은 꽃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내면의 청진한 표상을 보셨고 그래서 매화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분들처럼 매화를 좋아하여 분에다 기르며 방 안에 놓아 두고 보는 건 아니지만, 마당가에서 자라는 백매 홍매를 보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화는 환한 낮에도 밝게 피지만 달 있는 밤에도 은은히 아름답습니다. 화사한 불빛이라기보다 창호지를 밝히는 등잔불 같은 꽃입니다. 있는 듯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밤 깊어 적막해지면 비로소 스미는 암향이 좋은 꽃입니다. 저 꽃처럼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피어서 은은하고 청아할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하는 꽃입니다. 매화처럼 고매하고 맑게 피다 갈 수는 없겠지만 그 꽃 곁에서 지내는 행복한 시간이라도 누리고자 마당가를 서성이며 꽃 기다립니다.

86개(1/9페이지)
산문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 매화 홈지기 5687 2013.03.28 18:11
85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홈지기 3430 2013.02.07 14:20
84 쉬운 가르침 홈지기 3563 2012.08.06 16:56
83 바람으로 인하여 내게 온 것들은 바람으로 인하여 돌아간다 홈지기 4237 2012.02.22 21:30
82 그대 거기 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2] 홈지기 5265 2011.10.24 15:28
81 네 사랑은 얼마나 고통이냐 홈지기 3762 2012.01.19 19:22
80 첫 눈 홈지기 3667 2011.11.28 18:42
79 어리석은 자야 네 영혼이 오늘 밤 네게서 떠나가리라 홈지기 4480 2011.09.21 10:04
78 누가 불렀을까 홈지기 4394 2011.06.14 22:37
77 기도를 배우던 시절 3855 2011.03.08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