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야 네 영혼이 오늘 밤 네게서 떠나가리라

홈지기 | 2011.09.21 10:04 | 조회 4523

가을바람에 대추알이 불그스레 익는다. 깨밭 가에 서면 옅은 깨꽃 속에서 깨의 작은 낱알들이 익는 냄새가 향기롭다.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들풀들도 잘디잔 씨앗과 열매를 속으로 키우며 대견스러워 하고 있다. 들길에 나서 보면 가을바람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저마다 속으로 영글어가게 하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살면서 그동안 내가 씨 뿌린 것들의 성숙과 결실은 얼마만큼이나 되었는지 헤아려 보곤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눈물로 씨 뿌린 것들을 기쁨으로 거두리라.’이렇게 말했던 바로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직도 거두어야 할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 늘 불만족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크게 이룩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쓰라림과 허탈감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날이 쌓여져 가는 것이 많아 한 순간 한 순간이 기쁨이고 보람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을 가슴을 파고드는 가을바람 앞에서 마음을 다 비워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으면 싶은 게 있다. 많은 것을 쌓아 두기 위해서 땀 흘리며 달려오는 동안 우리 마음에 똑같은 크기로 쌓인 것이 있을 것이다. 욕심일 수도 있고 탐심일 수도 있고 이욕일 수도 있다. 때론 단거리경주 같기도 하고 때로는 장거리 레이스 같기도 한 우리 삶의 먼지 낀 길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오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정당하지 않은 길도 달려와야 하고 어느 정도는 반칙도 감수해야 하는 게 우리 인생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인생길이 어차피 그렇게 어렵고 냉혹한 길임을 다시 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인생길을 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뒤집어 써야 하는 흙먼지나 발에 달라붙는 진흙덩이를 가끔씩은 털고 떼어내고 가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만한 결실이나마 품게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번뇌와 갈등이 있었던가. 우리 마음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했으며 또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넘겨 준 불편과 고통은 어느 정도였을까.

번민의 끄트머리에 달라붙던 티끌과 뻘흙 같은 것들이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 괴로워하던 날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 번민의 속언저리에는 언제나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오만한 마음-불경에서 이야기 하는 탐, 진, 치의 이 어리석은 마음이 나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불어오는 가을바람 앞에 서면 가을바람은 그런 것들을 가만히 씻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 가을바람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이윽고 풀벌레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순간 내 마음에 붙었던 티끌들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오로지 쌓아두는 일만을 위해 살아온 부자가 창고를 더 크게 늘려 지으려고 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하느님이 오늘이 바로 그 부자를 데려가기로 한 날임을 생각하면서 ‘어리석은 자야 네 영혼이 오늘 밤 네게서 떠나가리라.’이렇게 말했던 성경 구절은 세상에서 우리가 쌓아야 할 것과 그 만큼의 크기로 우리가 잘 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마음에 대해 경계하는 말이다.

쌓아두는 일에만 매이지 말고 때로는 비워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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