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홈지기 | 2011.11.28 18:42 | 조회 3701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을 받아서 간 학교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름부터가 그랬다.

옥천(沃川)군 청산(靑山)면 백운(白雲)리 청산 고등학교.

푸른 산 흰 구름 속에 자리잡은 학교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문학 청년 시절의 열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 흘러 수없는 갈등을 겪어야 했다. 함께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던 동료, 선 ․ 후배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갈증, 세상 속에 처음으로 던져져 겪어야 했던 일상의 많은 어려움, 그릇된 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어 홀로 부딪히고 깨지며 괴로워하던 절망과 울분의 나날들이었다. 그 절망과 울분은 해가 바뀌어도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런 속에서 시적 진실과 삶의 진실 두 가지를 조화롭게 아우르지 못하고 내가 어디 서 있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고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는 견딜 수 없는 절망을 낳아 방황과 자학으로 이어지게 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모든 것이 술을 마시게 했다.

수업을 끝내고 교실 문을 나서다간 바라보는 단풍, 책상 앞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면 지는 낙엽 사이로 먼 곳에 강물이 한 줄기. 퇴근 길에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몇 개 남지 않은 플라타너스 이파리와 높은 나뭇가지 사이로 뜨는 은백색 초승달. ‘가을 숲을 누비다 돌아와 철모를 벗으면 그 속에 나뭇잎 하나’ 그렇게 씌어진 친구의 편지 구절. 추녀 밑에 빗물과 그 속에 흐르는 보름달이 물방울에 깨어지는 모습. 아침에 하숙집 방문을 열면 툇마루에 밤을 지샌 갈잎 한 개.

그런 것까지도 모두 한 잔씩의 술이 되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마시기 시작한 술은 단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견딜 수 없는 갈등과 절망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가서 철저하게 파헤쳐 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침묵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문학과 절망과 인생의 엄청난 문을 열게 했던 ‘ㅅ’형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보다 더 철저하게 고독해 하고 더 몸서리치게 절망하고 외경스럽던 ‘ㅅ’형이었다. 어쩌면 나의 방황은 ‘ㅅ’형과의 말없는 싸움인지도 몰랐다.

 

흔들리는 것도

울고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내 쪽이다…….

편지는 그런 시로 시작하고 있었다.

 

오직 몸부림 하나뿐이던 ‘ㅅ’형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편지를 움켜 잡고 강가로 나갔다. 이틀이나 연거푸 나갔다. 갈대숲 사이에서 모래사장에서, 저녁 물새들 속에서 한 계절이 끝나 가는 것을 보았다.

11월이 다 가지 않았는데 첫눈이 내렸다.

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첫눈 내린 날 아침 수염을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진 상다리도 고치고 머리도 시원하게 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오랜만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곧 겨울이 오고 삭풍 속에서 더욱 단단해져 가리라 그렇게 마음 먹었다.

 

낙엽 지는 날부터 시작해서 첫눈 내리는 날까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술을 마셔야 견딜 수 있던 그때의 그 절망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때 풀지 못했던 문제를 아직도 다 풀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삶 속에서 삶으로 살아내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들은 조금씩 있다. 시적 진실, 문학적 진실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진실이 아니고는 무정란과 같은 것이다.

삶으로 실천하고 삶 속에서 검증받지 못한 진실은 다만 관념 속의 진실일 뿐이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기다리며 찾아 헤매던 것들을 아직 다 찾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끝내 머릿속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앞으로 남은 세상을 사는 동안 더욱 몸으로 부딪치고, 이 땅에 발 디뎌 걸으면서 찾아가야 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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