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랑은 얼마나 고통이냐

홈지기 | 2012.01.19 19:22 | 조회 3815

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이다.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며칠 전 충북 영동엘 다녀오던 길이었다. 승합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엘 들렀다. 밤이 깊었는데 두 부부가 피로한 기색도 없이 아주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편은 기름을 넣으면서 “오십 원어치 더 넣었습니다” 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며 듣는 이를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기름을 넣는 동안 아내는 차 앞유리를 닦아 주었다. 우리 차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차가 와도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유소를 떠나려 하자 두 부부가 나란히 서서 구십 도 각도로 인사를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주유소가 바로 여기군요?” 하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빙그레 웃는다. 자기 일에 무척이나 열심인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청주 근처에 증평이라는 읍이 있는데 신문 지국을 운영하는 처녀 지국장이 한 사람 있다. 처음엔 구독 부수가 몇 십 부밖에 되지 않던 사고 지국을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천오백 부로 올려 놓은 사람이다.

신문사 지국장이지만 새벽마다 신문 배달도 직접 다 한다.

그녀가 사환으로 있던 학교의 선생님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다.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착한 마음씨에 감화되는 선생님들을 보았다. 성당에서 그녀를 만난 사람이든, 학교에서 그녀를 만난 사람이든 ‘아하 이렇게 착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한다.

 

단양에 ‘배달의 기수’라는 별명을 가진 해직 교사 한 분이 있다.

학교에서 쫓겨난 뒤 부인과 함께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식사 배달 주문이 들어오면 손수 철가방(?)을 들고 배달을 나간다.

어떤 때는 담배 한 갑을 사다 달라는 심부름도 해야 하고 빈 그릇을 찾아들고 오다가 제자들도 만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김 선생을 ‘배달의 기수’라고 부른다. 숨어서 울고 어린 자식을 안고 몰래 울기는 해도 여러 사람 있는 곳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인 김 선생은 올해로 네 번째 겨울을 학교 밖에서 맞는다.

김 선생에게 죄가 있다면 교사로서의 양심 하나를 지키고자 하는 곧은 마음을 가졌다는 죄밖에는 없다.

모두들 이 세상을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고 인간을 어디까지 아량으로 감싸야 하는가 수없이 되묻는다.

계층 이기주의든, 지역 이기주의이든 철저하게 이해 타산으로만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땅에 희망은 있는가 하고 묻기도 한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처럼 마음 황량하기 그지없다. 홍수에 잠겼다 물이 빠진 마을처럼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로 휩싸여 있는 착잡한 심정이다.

마음 어느 한쪽이 가로수 가지 끝에 걸린 비닐 조각처럼 나부끼고 있다.

절망, 이런 심정을 절망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시편의 말씀처럼 ‘네 사랑은 얼마나 고통이냐’ 이렇게 나도 내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이 땅에 주유소 일을 하면서도――열심히,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착하게, 거리의 교사가 되어서도――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접은 무릎을 다시 펴게 된다.

역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더 많은 말없는 다수에 의해서 방향을 잃지 않고 이끌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봄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봄에 그 꽃을 준비하지 않는다. 한겨울 내내 준비를 한다.

새벽 하늘은 아침이 되어야 밝아 오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그 어둠과 밤을 새워 싸우면서 준비해 온 것이다.

지금 비록 많이 절망스럽기는 하지만 희망도 늘 절망 속에서 절망과 싸우며 마련해 가는 것이다.

어제는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왔다.

때 아닌 겨울비가 산천을 때렸다.

식민지 지배자들과 싸우며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의 감옥에서 눈을 감을 때 단재 선생은 이 세상, 이 민족에게 희망은 없다고 절망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오늘보다 더 어둡고 척박한 상황 속에서 한 번도 절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비굴하게 타협하는 삶을 선택할 때 그분은 비굴한 안락보다 당당한 고통을 선택했다.

우리도 그들처럼 한평생을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게 옳다면, 깨끗하다면, 떳떳하다면 당당하게 가야 한다. 오늘 내가 씨 뿌린 것들을 내가 수확해야겠다고 욕심 부리지 말고 내 자식들이 거두어도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넉넉해지자.

접은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나자.

오늘 차가운 겨울 거리에 내가 뿌린 눈물은 이 땅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눈물에 멈추어 있지는 말자.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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