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으로 인하여 내게 온 것들은 바람으로 인하여 돌아간다

홈지기 | 2012.02.22 21:30 | 조회 4299

아침부터 바람이 분다. 나뭇잎들이 그 바람에 부대끼며 어찌할 줄 모르고 흔들린다. 키가 큰 나무, 잎이 무성한 나무들일수록 더 부대끼며 몸을 가눌 수 없어 한다. 열매가 무거워 견디지 못해 하던 나무들은 기어코 몇 개씩을 땅에 떨군다.

 

몸이 크고 무게가 나가면 바람에 끄덕없이 더 잘 견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큰 나무가 더 많이 흔들린다. 키 큰 나무의 가지가 더 잘 부러지고 열매가 많은 나무일수록 더 많은 상처를 입는다. 바람에 가장 많이 부대끼며 아우성치는 나무는 잎이 많은 나무들이다.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올때면 이렇게 바람이 분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올 때면 바람이 분다.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올 때도 바람이 분다. 막차는 떠나고 다시 올 열차는 깊은 잠에 들어 있는 밤에도 바람은 심하게 분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부를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 거리에는 바람소리뿐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발레리는 그렇게 노래했지만 바람이 분다 죽고 싶다 이렇게 치밀어 오르는 밤이 있다. 바람이 불면 가지는 나뭇잎을 우수수 떨구지만 바람이 불면 이 나이가 되도록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다 낙엽처럼 황량한 들판 끝으로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녁이 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울음소리를 내지만 마음 속 나무둥치는 천둥소리를 내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바람이 한 때는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던 바람이었다. 나뭇가지를 간지르며 어서 눈을 뜨라고 속삭이던 바람이었다. 꽃잎을 사랑스러이 어루만지며 향기를 멀리까지 실어 날라 주던 바람이었다.

 

푸른 잎을 윤이 나게 씻어 주던 어제 그 바람이 오늘 내 몸의 수 백 개 나뭇잎을 시들게 한다. 내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를 불러주던 바람이 오늘 내 이파리들을 버리라 한다. 바람으로 인하여 내게 온 것들은 이제 바람으로 인하여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끝없이 불어오는 이 바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죽는 길이라 한다. 나를 버리는 길이라 한다. 내 꽃, 내 열매, 나를 풍성하게 하던 푸르른 잎들을 버리는 길이라 한다. 어제를 버리고, 어제의 기억, 어제의 사랑, 어제의 기쁨, 어제까지 자랑스러워 하던 이야기들을 버리고 지금 바람 부는 들판에 시든 잎을 달고 서 있는 내 자신을 가감없이 인정하는 것이라 한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싱싱한 잎들이 이미 갈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갈색의 얼굴 황토색의 잎으로 서 있는 것을 인정하라 한다. 네가 먼저 버리고, 변하는 이 계절을 견딜 줄 알 때 너는 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처음의 네 모습 가난하던 그 빈 가지로 돌아가라 한다.

 

“헤어지자 / 상처 한 줄 네 가슴에 긋지 말고 / 조용히 돌아가자 .../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 흔적없이 헤어지자 / 오늘 또 다시 떠나는 수 천의 낙엽 / 낙엽”(졸시 ‘낙엽’중에서)

86개(1/9페이지)
산문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6 매화 홈지기 5857 2013.03.28 18:11
85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홈지기 3506 2013.02.07 14:20
84 쉬운 가르침 홈지기 3618 2012.08.06 16:56
>> 바람으로 인하여 내게 온 것들은 바람으로 인하여 돌아간다 홈지기 4300 2012.02.22 21:30
82 그대 거기 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2] 홈지기 5339 2011.10.24 15:28
81 네 사랑은 얼마나 고통이냐 홈지기 3815 2012.01.19 19:22
80 첫 눈 홈지기 3720 2011.11.28 18:42
79 어리석은 자야 네 영혼이 오늘 밤 네게서 떠나가리라 홈지기 4539 2011.09.21 10:04
78 누가 불렀을까 홈지기 4448 2011.06.14 22:37
77 기도를 배우던 시절 3912 2011.03.08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