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배우던 시절

| 2011.03.08 18:59 | 조회 3888
적하리의 봄은 포도껍질을 태우는 연기와 함께 왔다.
학교가 논밭 한가운데 덩그라니 있었기 때문에 교문을 벗어나면 바로 포도밭이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이 겨울을 지내느라 갈라지고 터진 포도나무 껍질을 벗겨내면서 드러난 속 가지의 빛깔은 참 맑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하셨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가지도 못되고 그저 벗겨져 불에 태워지는 포도나무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내 안과 밖에는 그렇게 벗겨져 태워버려야 할 허물들이 많았다.

나는 그때 또 그곳으로 쫓겨 와 있었다. 외롭고 지쳤고 힘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가파르게 다스려 갔고, 절망 때문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난하고 초라했으며, 고통스러운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때만큼 마음이 맑고 순수하던 시절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기도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성당으로 불러간 이들은 낯모르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었다. 대학시절부터 빠져 있던 실존주의철학으로 인해 오만했던 나의 태도가 무너진 것도 그분들 때문이었다. 사회과학 서적 몇 권을 읽고 시대와 민족에 대해 고민합네 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고쳐준 분들이었다. 이웃을 위한 문학, 민중의 고통과 함께 하는 시를 써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이웃의 어려움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로 시를 썼던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 분들이었다.
낯모르는 이웃의 병상에 찾아 와 시멘트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철학과 내 과학과 내 문학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면식도 없는 이웃 아낙을 찾아 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 달라고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고통받는 내 이웃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모습으로 문학을 해왔던가 하는 반성을 했다.

누구에게고 어디서고 무릎을 꿇을 수 없다 하고 생각해 왔던 것은 얼마나 오만한 자세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내 자신을 인정하고 유한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나 같은 인간이라고 인정하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리고 많이 울었고 많이 뉘우쳤다. 뉘우치고 눈물 흘린 만큼 마음이 맑아졌고 깨끗한 시와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시집을 쓰던 무렵이었다.

이 세상에는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온유한 삶의 태도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많이 아파했지만 아픔을 통해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분은 이 땅의 외진 구석에 한 포기 풀처럼 버려져 있는 나를 모진 바람으로 흔들어 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뒤에 깊고 긴 어둠으로 오랜 날 그렇게 덮어두었다가 풀리는 햇살로, 아침 하늘의 모습으로 천천히 오시곤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밥 한 그릇 앞에서도 이 밥이 부끄러운 밥인지 기쁘고 고맙게 먹는 밥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없어져 버린 그 시골학교에 쫓겨 가 있던 시절, 그렇지만 기도를 처음 배우던 시절, 통회의 눈물 한 줄로 시 한 줄을 만나던 시절, 그런 시절을 남은 생애 동안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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