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홈지기 | 2011.11.29 12:00 | 조회 4119

 여름이 다 가도록 상사화 꽃이 보이지 않아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으려나 보다 하고는 상사화 보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끝 무렵에 꽃대 몇 개가 쑤욱 하고 올라오더니 연이어 마당가로 가득하게 상사화가 피는 것입니다. 여름 한 철 푸른 잎으로 가득했던 산이 분홍색 꽃등으로 환했습니다.


 봄에 푸른 칼 같은 상사화 잎이 딱딱하게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올 때는 그 잎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천천히 무너져 사라지고 말면 한동안 상사화에 대해서는 잊고 지냅니다. 그러나 잊어버리고 사는 어느 날 상사화는 불쑥 나타납니다. 잎은 꽃을 볼 수 없고, 꽃 또한 잎을 본 적이 없는 채 서로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 부른다는 건 다 아실 겁니다.


 상사화 솟아 오른 곳은 잎이 자라다 사라진 자리입니다. 뿌리 내린 적 없는 자리에 피는 꽃은 없습니다. 마당의 잔디에 섞여 있는 풀을 뽑다가 한 뼘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 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쏙 뽑았더니 뿌리 끝에 반으로 갈라져 있는 도토리가 매달려 따라 올라옵니다. 다람쥐가 묻었든, 제가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든 심어진 씨앗이 있어서 잎이 올라왔을 겁니다. 그냥 버리기 미안해 비탈진 언덕에 옮겨 심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려 한 적이 없는데 생각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은 내가 하려고 해서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제 발로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튀어 나오는 생각들은 모두 다 내가 저장시켜 놓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뒤에 머릿속에 저장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내가 저장해 두지 않았는데 튀어나오는 것들은 없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가슴 저미는 음악, 잊을 수 없는 사랑, 고마운 사람, 감동적인 장면, 착한 언어, 선한 마음, 즐거운 기억,  베풀고 나누었던 시간, 좋은 만남, 가르침이 되었던 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평소에 좋은 것들을 많이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그것들은 언제 상사화처럼 불쑥 솟아나올지 모릅니다. 

 

-2010.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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